메뉴 메뉴
닫기
검색
 

학술·사회

제 678 호 미디어 속 감춰진 모방범죄, 규제 마련 시급

  • 작성일 2019-09-26
  • 좋아요 Like 1
  • 조회수 5584
윤소영
  1. 드라마를 모방한 고유정의 범죄

  잔인한 범죄 행각으로 논란이 되었던 고유정이 드라마 속 장면을 모방한 정황이 드러났다. 고유정은 지난 5월, 제주시 조천읍의 한 펜션에서 전 남편을 흉기로 살해한 뒤 시신을 토막냈다. 이어 표백제로 시신을 추가적으로 훼손한 고 씨는 제주 바다와 부모 소유의 아파트에서 시신을 유기했다. 고 씨의 범죄 수법을 두고,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무엇보다 시신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훼손했다”며 “한때 배우자였던 사람을 잔인하게 분해할 정도면 역대 가장 잔인한 범인을 보고 있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또한 이나미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몇 년 사이 인기를 끈 드라마나 영화를 모방한 것이 아닌가 싶다”며 “(그런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왔던 것들과) 범행 행각이 상당히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의 주장은 고 씨의 현 남편인 A 씨의 증언을 통해 그 정황이 더욱 뚜렷해졌다. A 씨는, "(‘킬링 이브’ 속)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미모가 굉장히 출중하다. 굉장히 예쁘다 좋다 이런 말들을 종종 했었다. 그런 여주인공들을 굉장히 좋아했다."라고 밝혔다. 영국 드라마 ‘킬링 이브’ 속 여자주인공은 사이코패스로, 그녀가 언급한 범죄 수법이 고 씨의 범죄 수법과 상당 부분 일치해 계획범죄의 정황이 짙어지고 있다.



미디어 속 숨겨진 또 다른 범죄위험

  고유정 사건뿐만 아니라, 미디어를 모방한 범죄는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영화 ‘공공의 적’을 모방한 용인 일가족 살인 사건, 드라마 ‘스카이 캐슬’을 모방한 교수 피살 사건 등 그 사례 또한 다양하다. 그렇다면 모방 위험성이 있는 이 미디어들이 방송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제재하는 규정이나 제도는 없는 것일까? 우리나라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영상물등급위원회, 간행물윤리위원회 등 미디어 콘텐츠 심의 기구를 두어 공공성과 공정성을 해치는 부분에 대해 제재를 가한다. 


◎ 방송은 과도한 폭력(언어 등 비물리적 폭력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을 다루어서는 아니 되며, 내용전개상 불가피하게 폭력을 묘사할 때에도 그 표현에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개정 2014.1.9.> 

◎ 방송은 스포츠·게임 프로그램 등에서 지나치게 폭력적인 내용을 방송하여서는 아니 된다. 

◎ 방송은 폭력을 조장하거나 미화·정당화하는 내용을 포함하여서는 아니 된다. <신설 2014.1.9.>


  하지만 명문화한 방송심의규정은 어디까지나 기준일 뿐이지 이를 적용해 최종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은 사람의 몫이다. 사람에 따라 미디어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잣대는 천차만별인지라 모호하게 생각되는 부분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영화 ‘기생충’의 경우 15세 관람가라는 연령등급에 비해 영화에서 노출되는 장면들의 다소 선정적이라는 의견이 있었다. 이에 영상물등급심의위원회는 "주제, 내용, 대사, 영상 표현에 있어 해당 연령층에서 습득한 지식과 경험으로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것을 제한적이지만 자극적이지 않게 표현한 수준"이라고 '기생충'을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으로 분류한 이유를 설명했다. 영화 ‘기생충’ 외에도 비슷한 논란이 이어지자 심의위가 심의에 있어 편파적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오늘 날 심의위의 위상과 기능은 당초 국민 요구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아 아쉬움을 자아내고 있다.

    선정성 논란이 있었던 영화 기생충 (출처: 네이버 영화 소개)



예술과 상술 사이

  그렇다면 수많은 논란을 감수하면서도 왜 미디어는 선정적인 콘텐츠를 자꾸만 노출하는 것일까? 왜 수많은 미디어들은 모방 위험성이 있는 장면을 담고 있을까? 그 답은 바로 방송을 보는 사람들, 즉 시청자의 수요에 있다. 자극적인 것을 원하는 사람들에 맞춰 미디어는 더욱 자극적인 장면을 만들어내고, 이에 무뎌진 사람들은 점점 더 자극적인 미디어를 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심의에서 제재를 감수하면서라도 이목을 끄는 노이즈 마케팅을 통해 시청률을 끌어올리려는 채널들도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처절할 정도의 생존 경쟁으로 내몰린 다채널 환경의 초라한 단면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미디어의 영향을 고려하여 모방 위험성이 있는 자극적인 콘텐츠를 자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미디어는 범죄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자극적인 콘텐츠 또한 더 이상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용인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방범죄를 소재로 한 연극 킬롤로지 (출처: 네이버 연극 소개)


  이에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자극적인 내용일수록 대중들이 좋아하고, 미디어가 결국 모방범죄를 조장하는 측면이 있다. 미디어와 포털 사이트 등에서 유해 정보에 대한 자정 노력이 필요하며, 이를 위한 구체적인 법안 마련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연극 ‘킬롤로지’는 미디어와 대중이 외면해 온 범죄와 윤리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드라마 ‘힘쎈 여자 도봉순’은 모방범죄를 통해 일어나는 연쇄살인을 극 중 주요 사건으로 설정함으로써 그 위험성을 보여준다.



미디어, 대중의 거울

  반면 범죄 예방을 이유로 미디어를 통제할 수는 없다는 의견 또한 존재한다. 방송심의규정이 자칫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침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팽팽히 맞서고 있는 두 의견의 합의점은 어디일까? 전문가들은 그 답을 ‘지나치게 자극적인 것을 원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바꿔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김영호 우석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같은 장면이더라도 표현 기법에 따라 그 심의가 달라질 수 있다. 내용 전개 상 살인이 불가피한 경우가 있다고 하자. 피해자의 죽음을 암시하며 장면을 전환하는 미디어와 칼이 피해자의 몸을 관통해 등 뒤로 나오고 피가 솟구치는 장면을 노출하는 미디어는 다른 심의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만큼 표현 수위에 신중을 가해야 한다는 뜻이다.”라고 주장했다. 최대한 자극적인 부분을 배제하여 장면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범죄에 대한 윤리적 문제와 모방범죄의 위험성을 대중에게 각인시킬 필요가 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정보 홍수 시대에 모방범죄를 예방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범죄자는 결국 잡힌다’, ‘완전범죄는 없다’ 등의 메시지를 미디어에서 제시할 필요가 있고, 근본적으로는 개인이 모방범죄에 대한 생각을 가지지 않는 환경을 조성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미디어에 대한 규제보다 중요한 것은 그 미디어를 받아들이는 대중의 태도라는 것이다.



김경관, 윤소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