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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

제 6 호 먼지 속에서 나의 교지

  • 작성일 2024-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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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1468
이소명

편집장 이소명 202210058@sangmyung.kr


  신문방송국 국장 교수님과 면담을 나누던 중, 특색 없는 교지이기에 문학잡지로 바꾸는 건 어떠냐는 제의를 하셨다. 당장은 어려우니 한두 개씩 문학을 써 보자고. 반발심이 들었다. 갑자기 문학이라니, 거기다 교지가 특색이 없다니. 집에 가면서 그 말을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많은 생각이 오갔다. 


        문학을 쓴다고 없던 독자가 늘어나겠는가?

        그래도 안 해보는 것보단 해보는 게 낫겠지…….


  그래서 수필이라는 거창한 듯한 명칭을 빌려 나의 경험과 생각을 끄적여 보려 한다. 따라서 이 글은 명확한 주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상명대의 자하교지의 이야기이며, 그 교지의 편집장을 맡고 있는 필자의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독자들이 이 글을 왜 읽어야 하는지 묻는다면 그 또한 명확한 이유는 없다. 그저 대학가에서 사라져 가는 무수한 ‘교지’와 그 교지 일원들의 이야기를 훑으며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교지의 필요성에 대해 가볍게 생각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교지는 한 대학의 역사이고, 청춘들의 이야기니 무조건 존재해야 한다는 강압적인 글은 아니다. 교지가 아니더라도, 학보가 아니더라도 SNS로 대학 내 이야기를 빠르게 접할 수 있어 더 이상 그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해도 좋다. 그 생각에 나 또한 부정할 수만은 없기에,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교지의 일원이 불안한 마음에 남기는 작은 끄적임이다. 



  2023년 4월 중순부터 먼지와 함께 교지부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5월에는 교지부실 이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교지부실과 함께 한 기간은 단지 1년에 불과했는데, 아주 오래된 나만의 장소를 잃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교지가 사라져 가는 과정 속에 있는 듯한 오묘한 순간이었다. 


  2022년 4월 나는 교지편집부의 수습기자가 되었다. 지금에서야 글 쓰는 것을 즐기고 진로도 그쪽으로 결정했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글과는 그리고 세상 사는 이야기와는 거리가 먼 그저 그런 인사대 학생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교지 수습기자 모집에 지원한 이유가 있다면 신입생이 된 채 뭐라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왕이면 돈도 좀 되고, 생산성도 있으며 미래에 도움이 될 만한 그런 걸 말이다. 편집장이 된 지금 시점에서 교지 생활이 위 세 요건에 충족하느냐고 묻는다면, ‘아주 그렇다, 그렇다, 보통이다, 아니다, 아주 아니다’ 중 그렇다와 보통이다의 어느 중간 지점일 것이라 대답할 수 있겠다. 정기자가 된 후로는 원고료 이외의 리더십 장학금도 받게 되어 신문방송국 일원이라는 것에 책임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독자들이 우리의 글을 읽고 공감이든 분노이든 어떠한 형태로든 감정을 느꼈다면, 생산성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기자를 꿈꾸는 지금 교지를 안 하는 것보단 하는 것이 미래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더불어 교지는 즐겁고도 소중했다. 교지를 되돌아보면 그 시기의 우리를 한눈에 되돌아볼 수 있다. 코로나 시기로 우리가 어떤 학교생활을 했고, 어떠한 위기를 겪었으며, 어떠한 고통을 느꼈는지 말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언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는지, 전장연의 시위로 아침마다 에브리타임에 불만을 토로하던 우리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제 막 시작하던 ‘천 원의 아침밥’ 행사의 미숙한 점이 뭐였는지, 코로나가 잠잠해지고 낭만을 되찾기 시작한 우리 대학가의 모습은 어떤지 글로 현상을 그려낼 수 있다. 유년 시절 작성한 일기장을 성인이 된 후 열어보듯, 교지는 우리의 낡은 일기장이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빛을 발한다. 


  2022년 9월 나는 교지편집부의 정기자가 되었다. 야심 차게 기획한 두 개의 기사 바로 ‘일본-대만 역사’와 ‘그 당시 뜨거운 감자 검수완박’이었다. 일본과 대만 역사에 대한 기사는 논문과 기사 그리고 역사 방송을 찾아보며 자료 조사에 힘을 썼을 뿐 글을 써 내려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두 국가의 관계를 기사 작성 직전에 알게 되었기에 내가 너무 무지했던가 고민도 했었지만, ‘저도 이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어요’라던가 ‘대충 들어보긴 했는데 자세히 알게 되니 더 충격적이네요’라는 감상평들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남몰래 미소를 띠기도 했다. 골칫덩어리는 ‘검수완박’ 기사였다. 자료 조사가 어려울 건 예측했지만, 결론짓기가 더 어려울 건 예측하지 못했다. 중립성을 가지되 검수완박에 대한 내 생각을 전하기란 쉽지 않았다. 일개 대학생인 내가 정치인과 법률가의 의견에 반대를 던지는 글을 유연하게 쓰기란 쉽지 않다. 교지인들의 수많은 피드백을 거쳐 그렇게 글을 마무리 지었다. 부끄럽지만서도 가장 공을 들인 애증을 느끼는 글이었다. 하지만 발간 직전 중립성이 부족하며, 정치에 관한 내용이라는 이유로 최종 발간 리스트에서 제외되었다. 그 글은 나의 노트북 파일에만 남아있는 글이 되었다. 다양성과 중립성을 지키지 못한 언론은 결국 독자를 지켜낼 수 없다. 소수인 대학 언론에서 글의 다양성과 중립성을 지키는 건 더욱 어렵기에 더욱 중요하다. 정치 기사에서 독립성이란 외줄 타기와 같은 것이다. 


  2023년 3월 나는 교지편집부의 편집장이 되었다. 편집장이 된 후 맨 처음 한 일은 수습기자를 모집하는 것이었다. 겨우 1년 차가 편집장이라니. 내가 원해서 시작했지만, 걱정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겨우 1년 된 애가 수습기자 면접을 보다니 그 꼴이 스스로 우스웠다. 짧은 자기소개와 면접 그리고 짧은 기사를 받았다.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분야에 관심이 있고, 어떤 문체를 가져, 어떤 분위기의 글을 완성해 낼지가 말이다. 나는 딱딱한 문체에 정보 전달이 주된 내용이고, 정치나 사회 현상에 관심이 많다. 다른 부원은 소소한 일상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지만 지나쳐서는 안 되는, 그런 작고 소중한 이야기를 따뜻하게 전한다. 이처럼 교지가 균형성을 이루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수습기자 모집을 마무리 지었다. 

  그 후, 약 한 달간은 기사 작성을 하지 못했다. 교지부실의 이사 준비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교지부실은 학생회관 322호로 3층 가장 끝자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넓진 않지만, 조용하면서도 햇볕이 잘 드는 곳이기에 교지와 잘 어울리는 장소라 생각했다. 그런데 사범관에 있던 우체국을 학생회관으로 옮기고, 학생회관 내 신문방송국의 부실들을 이렇게 저렇게 옮기다 보니, 318호를 교지편집부와 영자신문사가 함께 쓰게 되었다. 이전 부실보다는 조금 넓어졌지만, 더 이상 교지부실에서 따스한 햇볕을 즐길 수는 없었다. 318호 옆인 317호에는 우체국이 있는데 그 사이 벽은 가벽이라 조용한 교지부실도 사라졌다. 교지와 영자가 동시에 회의를 진행할 수 없으니, 회의 일정을 조정해야 했고 부실에서 서로 마주치게 된다면 담백한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이삿짐을 쌀 때, 아주 오래전 교지의 사진을 보았다. 민주화운동을 취재 나갔을 적, 노동운동을 취재 나갔을 적의 사진은 뜨거운 무언가를 느끼게 해주었다. 무대에 올라가 축제를 즐기거나, 단란한 학교생활과 교지생활을 즐기는 사진은 우리의 부모님 또는 그의 부모님의 대학 생활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솔직히 말해 지금의 교지는 뜨겁지 못하다. 미지근한 정도의 온도에 머무르고 있다. 독자들의 관심도 미지근하다. 어떻게 해야 교지가 다시 뜨거워질지, 아니면 미지근한 정도가 시대의 변화라 받아들이며 수긍해야 할지 오래된 먼지 속에서 고민이 시작되었다. 결론을 내리진 못했지만, 이 고민을 멈추진 않을 것이다. 이 고민이 조금은 더 나은 방향성을 내려주리라 믿으면서 말이다.


  2023년 7월은 무더운 하계 방학의 시작이었다. 방학 동안 꼭 마치겠다고 다짐한 것이 있다. 바로 ‘2022년 기사’ 종이책 제작이다. 원래 교지는 종이책을 발간하는 언론기관이었지만 2020년 코로나 사태로 종이책을 찾는 학우가 적어지자, 웹진의 형태로 전환되어 더 이상 종이의 교지는 만나볼 수 없게 되었다. 웹진은 종이책보다 접근성이 좋아 교지를 쉽게 공유할 수 있으며, 불필요한 종이 소비를 막을 수도 있는 장점들이 있다. 그런 ‘쉽고 간편함’이라는 웹진의 장점이 나에게 아쉬운 점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교지의 험난했던 제작 과정이 너무나도 쉬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글의 소비가 너무 가볍게 발생하는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촌스러워 보이기도 했지만, 고전적인 것을 좋아하는 것이라 애써 포장하며 종이책 제작을 시작하였다. 우선, 2021년의 기사를 모아 종이책을 만들었던 선배에게 조언을 구했다. 처음에는 전자책 편집기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글의 배치, 폰트, 크기를 조율하였다. 방학 동안 도서관에서 근로하며 시키시는 일이 없을 때는 허구한 날 노트북만 들여다보았다. 기사들의 배치를 마치고는 여는 글을 작성하고, 표지를 제작하여 20권 정도를 주문하였다. 더 이상 학교의 지원이 아닌, 사비로 제작한 것이라 정기자들과 조금씩 돈을 모아 제작하였다. 그러면서 ‘이렇게까지 해서 종이책을 굳이 만들어야 할까’라는 고민을 한 적도 있다. 그에 대한 결론은 ‘할 수 있는 한, 만들고 싶다’였다. 자하는 1969년 창간호부터 매년 교지를 보관하고 있다. 간간히 보관되지 못 한 년도도 있지만, 거의 매년 교지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사 당시 교지의 짐이 가장 많았다. 이런 역사를 끊고 싶지 않았다. 표지가 찢기거나 색이 변색이 되고, 먼지가 쌓이기도 했지만 상명여자사범대학 시절부터 학우들의 노력이 깃든 책들이다. 그렇게 수많은 교지는 그대로 우리 옆에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인터넷에 남는 기록은 장점대로 쉽고 간편하게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다. 결국, 종이책은 오랫동안 간직하여 우리의 낡은 일기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만든 책이다. 


  독자들도 자신만의 낡은 일기장이 있는가? 특별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노력과 추억과 소중함이 깃들어 있다면, 그것은 낡은 일기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낡은 일기장은 교지이고, 나의 교지는 이렇다. 


  p.s. 수많은 대학 교지가 오랫동안 존속되기를 바라며